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아이제아 토마스(1961) (문단 편집) == 선수 경력: 배드 보이즈의 보스 == 1981년 드래프트에서 1라운드 2순위로[* 참고로, 토마스를 제치고 전체 1순위가 된 선수는, 후일 [[아드리안 댄틀리]]와 트레이드되어 피스톤즈 유니폼을 입고 토마스와 함께 2회 우승을 차지한 댈러스 매버릭스 출신의 스몰 포워드 마크 어과이어(Mark Aguirre, 드폴대). 둘은 같은 도시에서 자란 절친이었으며 어과이어가 피스톤즈로 트레이드 되었을 때 썩 내키지 않았던 팀 동료들에게 어과이어를 소개해주고 관계를 좋게해준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지명된다. 여담으로 그는 처음에는 [[디트로이트 피스톤즈]]에 오는 것을 탐탁치 않았다. 그래서 피스톤즈와 인터뷰에서 일부러 건성건성 대답하였다고 한다. 시카고 출신이었던 그는 시카고로 가고 싶어했으나 오히려 그런 모습을 본 맥클로스키 단장은 "니가 무슨 짓을 하든지 상관없어. 만약 우리 차례때 니가 아직 드래프트 되지 않았으면 너 뽑을꺼야" 라고 단정지었다고 한다. 결국 배드 보이즈의 리더가 되어 자기가 가고 싶어했던 [[시카고 불스]]를 그리 여러번 좌절시켰던거 보면 참... 어쨋든 [[디트로이트 피스톤즈]]에 지명된 토마스는 전시즌에 21승에 그쳤던 팀을 39승까지 끌어올렸다. 하지만 토마스가 루키였던 시즌과 2년차 시즌에 팀의 전력은 아직 배드 보이즈 시절의 그것이 아니었다. 토마스가 드래프트 된 다음해에 훗날 악명을 떨치게 되는 [[빌 레임비어]]가 팀에 합류하면서 기본 토대는 만들었지만, 여전히 팀은 중하위권 전력이었고 [[플레이오프]]는 꿈도 꾸지 못했다. 그러다가 3년차 시즌에 NBA를 대표하는 명장이자 토마스의 은사 [[척 데일리]]가 감독으로 취임하면서 팀은 달라지기 시작했다. 토마스도 평균 21.2점 11.1 어시스트를 기록하며 커리어를 통틀어 첫번째 더블 더블 시즌을 보냈고 팀도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다. 플레이오프에서는 1라운드에서 [[뉴욕 닉스]]에게 패배해 탈락했지만 5차전까지 가는 접전이었다. 이후 피스톤즈는 맥클로스키 단장의 주도 하에 차근차근 팀의 전력을 꾸려가기 시작하는데, 1985년 드래프트에서 토마스와 함께 백코트 전력의 핵을 이루게 되는 [[조 듀마스]]를 18순위로 뽑았다. 득점과 볼 핸들링이 준수한 듀마스의 합류로 팀의 득점과 볼 배급, 경기 리딩까지 막대한 짐을 혼자 짊어지고 있던 토마스의 부담을 크게 덜 수 있었고, 가드 포지션 최고의 수비수 듀마스 덕분에 인사이드의 거칠고 강력한 수비와 백코트의 일선 수비가 조화를 이루면서, 비로소 배드 보이즈의 골격이 갖춰졌다. 또한 폭발적인 슈터 '마이크로웨이브' 비니 존스, 레임비어와 함께 악명을 떨친 인사이드의 터프가이 릭 마혼 등이 핵심 전력으로 자리잡으면서 익히 알려진 배드 보이즈의 팀 컬러가 완성되었다. [* [[데니스 로드맨]]은 배드 보이즈가 동부의 강자로 명성을 떨치던 87~89년 시점에는 백업 수비수로 막 성장하던 무명의 블루컬러 워커였을 뿐이다. 수비를 지휘하는 것은 주전이자 배드 보이즈의 행동대장 릭 마혼이었는데, 로드맨은 마혼이 이적하기 전까지 그저 마혼의 꼬붕들 중 하나로 여겨질 뿐이었다. 따라서 배드 보이즈를 대표하는 주축이라 하기엔 맡고있는 롤이나 네임밸류가 한참 떨어졌으며, 그가 팀의 핵심으로 완전히 자리한 때는 이미 배드 보이즈의 끝물인 1991~1992 시즌부터였다.] [* 게다가 이 당시 로드맨은 헤어스타일이나 기행은 커녕, 리그에 흔하디 흔한 거친 수비수들 중 하나일 뿐, 외모도 수수했고 플레이 역시 화려함과는 거리가 먼 스타일이라 전혀 주목을 받지도 않았다. 게다가 파워포워드로는 체격이 상당히 작은 편이라(찰스 바클리보다 키는 조금 더 크지만 체격은 호리호리했다), 주전으로 중용하기 시작한 것은 1991~92 시즌부터였다.] 1987-1988 시즌, 마침내 디트로이트는 동부의 강호들을 아작내고 파이널에서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레이커스]]와 맞붙었다. 당시 레이커스는 [[매직 존슨]], [[카림 압둘자바]], [[제임스 워디]] 등이 포진한 최고의 팀이었다. 3승 2패로 앞선 채 맞은 6차전에서 토마스는 도중에 발목이 나가버리지만 출전을 강행, 3쿼터에만 25점을 넣으며 파이널 한 쿼터 득점 최고기록을 경신하는 대활약을 보였지만[* 훗날 그의 친구이자 라이벌이었던 [[매직 존슨|매직]]은 이 경기를 언급하면서 아이제아 토마스가 스테픈 커리보다 역대 포인트 가드 순위가 낮은게 도저히 이해가 안간다고 회상할 정도였다.실제 그 경기를 보면 아이제아 토마스를 싫어하는 사람도 인정할 수 밖에 없을정도로 말도 안되는 사기슛들이 들어가고는 했다. 그것도 한발을 절으면서...] 결국 디트로이트는 7차전까지 가는 접전 끝에 두 경기를 연속으로 내주며 아쉽게 패배했다.[* 실제로 이 6차전 경기는 그 당시 상당히 말이 많았던 경기였는데, 빌 레임비어가 카림 압둘자바를 밀었다고 받은 파울이 영 시원치 않은 파울이었기 때문이다. 모든 디트로이트 선수들은 그 파울을 인정할 수 없다고 했고 여러 농구 관계자들도 이해할 수 없다고 했으며 파울을 받은 레이커스의 제임스 워디도 "심판이 인정했으니 파울이다" 라고 하면서 딱히 강하게 부정하지 않는 모습도 보여줬다. 이에 "조던 룰" 이라는 책을 기록한 농구 저술가는 빌 레임비어가 파울을 받은것은 카림 압둘자바를 밀어서가 아니고 그 전이 수없이 많은 선수들을 밀치고 반칙해서 받은 파울이었을 것이라고 저술하였다.] 이 때 토마스는 매우 큰 굴욕감을 느꼈다고 한다. 그리고 바로 다음 시즌인 1988-1989 시즌에 두 팀이 다시 맞붙었는데, 이때는 매직 존슨을 비롯한 레이커스의 주축들이 모두 부상을 달고 있었고 복수의 칼을 갈던 토마스와 배드 보이즈에게 자비란 없었다. 파이널에 진출하며 토마스가 한 말이 '레이커스 외에 다른 팀이 올라오는 건 원하지 않는다. 우리가 원하는건 복수다'였다. 결국 디트로이트가 4전 전승으로 레이커스를 처참히 발라버리고 우승. 이 시즌은 플레이오프에서 [[시카고 불스]]에게 2패한 거 빼면 전승이었다. 그 다음시즌인 1989-1990시즌에는 같은 동부지구 [[시카고 불스]]의 강력한 도전이 있었으나 이겨내고 파이널에서 [[포틀랜드 트레일블레이저스]]를 맞이하여 4승 1패로 다시 우승. 2년 연속으로 우승을 차지한다. 토마스는 파이널 [[MVP]]에 올랐다. 하지만 1990-1991 시즌 이후로 토마스와 배드 보이즈의 번영은 끝이 났다. 시카고 불스에 의해 4전 전패로 컨퍼런스 결승전에서 무너지고 난 뒤 팀의 성적은 내리막을 걸었다. 1991-1992 시즌을 끝으로 척 데일리도 사임하면서 배드 보이즈는 사실상 해체되었다. 토마스는 1993-1994시즌까지 뛴 후 현역에서 은퇴한다. 참고로 이당시 조던이 이끌던 전성기 불스, 버드가 이끌던 전성기 셀틱스, 매직 존슨이 이끌던 레이커즈를 상대로 포스트시즌 승률 50%를 넘겼던 팀은 배드 보이즈가 유일하다.[* 조던에게 3승 1패, 버드에게 2승 2패, 매직에게 1승 1패.]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